teen.mk.co.kr

2024년 09월 20일 금요일

교양·진학 인문

쏟아지는 비…그 속에 투영된 사람들의 마음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설명[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한 바람.

앞서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돗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밝고 간다



정지용 작가의 현대시다. 제목을 모르고 읽으면 의아하다가 제목을 알고 나면 단번에 이해가 가는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비'다. 이 노래는 그 어떤 사진이나 영상보다 비 내리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는 특히 여름에 많이 내린다. 여름에 비가 오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왔고 비가 온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조선시대 윤선도 작가의 시조다. 옛날에는 그 무엇보다 농사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 일을 잠시 쉬어 가는 때가 있다. 바로 장마 기간이다. 비가 오면 농사일을 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늘이 주관하는 일을 사람이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랫말 속 화자도 이 이치를 알고 있다. 화자는 장마가 이어지고 있으니, 문을 닫고 소를 먹이라 한다. 이번 기회에 농기구도 다스리라 한다. 농사일을 할 수 없으니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것을 돌보며 재정비하라는 것이다. 날씨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는 이처럼 쉼 없이 달리던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기도 한다. 쏟아지는 비를 핑계로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장마가 이렇게 쉼표의 의미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쏟아지는 장마는 맑을 하늘을 빼앗는다. 맑음을 빼앗긴 것은 하늘뿐만이 아니다. 오랜 장마는 하늘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먹구름을 안겨 준다.

윤흥길 작가의 현대소설 '장마'의 첫 부분이다.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는 구절이 와 닿는다. 우리나라에서 '장마'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구절이다. 지겹도록 비가 쏟아지는 장마 기간. 소설은 장마에 빗대어 한국전쟁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가족끼리 총을 겨누고 싸워야 했던 전쟁의 아픈 비극을,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장마에 빗대어 풀어내고 있다.

소설 속 식구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반목하며 싸운다. 식구끼리 총칼을 겨눠야 하는 아픈 사연이 이어지다가, 소설의 후반부에는 서로 용서하며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구절은 단순히 기후현상의 하나인 '장마'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 세상을 물걸레질하는 것 같은, 그 힘든 기간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기간이 아주 많이 지루했다는 의미이다. 비 내리는 기간은 이렇게 사람들의 생활뿐 아니라, 감정과 마음까지도 어렵게 한다.

조선 후기에 불린 것으로 알려진 사설시조다. 이 노래에도 역시 '비'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비는 앞서 살펴본 비와는 많이 다르다. 노래 속 화자는 여러 가지 시름과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시름에 뒤척이던 화자는 자신의 온갖 시름 걱정들은 방패연에 새겨 하늘에 띄우고자 한다. 그러면 그 연은 하늘 높이 둥둥 떠다니다 구름 속에도 들어가고 동해 바다도 건너다가 나무에 걸린다. 그리고 결국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 그 걱정은 자연스럽게 빗물과 함께 사라진다.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걱정을 한 아름씩 붙들고 지낸다. 그런데 화자는 그 걱정이 연에 실려 하늘을 떠다니다가 내리는 빗물에 쓸려 사라져 버리길 기대한다. 여기서 비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부정적이고 안 좋은 것들을 모두 없애주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앞선 시조에서는 비가 '쉼'의 의미였고, 소설에서 '고난'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노랫말에서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

비는 참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보며 사람들은 참 많은 생각을 했으며, 우리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비에 새겨진 사람들의 마음들을 엿볼 수 있다.

[전현선 양주고 국어교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