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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20일 금요일

교양·진학 인문

잔잔한 충고의 힘, 강한 질책보다 세다

[사진 제공 = 연합뉴스]
사진설명[사진 제공 = 연합뉴스]

조선시대 정치가 신흠(1566~1628)이 썼다고 알려진 시조이다. 해오라기는 '왜가리'과에 속하는 새의 한 종류이다. 새와 물고기가 머무는 강가가 그려지는 노랫말이다. 아마도 해오라기는 물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이 새를 향해 무심코 쓴소리를 건네고 있다. 물고기 잡는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건네는 잔소리 같은 느낌이 있다.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골고루 먹어라, 착하게 살아라'와 같은 당연한 당부의 말들을 늘 던진다. 사실 할머니의 잔소리는 엄마, 아빠의 꾸지람처럼 강렬하지 않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부모님의 호된 불호령보다 더 오래 마음속에 자리 잡기도 한다. 굳이 따지자면 이 노랫말도 부모님의 무서운 꾸중보다 할머니의 은근한 당부의 말에 가깝다. 날카롭지는 않지만 차분한 힘이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노래를 지었을까. 정말 해오라기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실, 이 노랫말의 해오라기와 물고기는 특정한 인물들을 저격하고 있다. 조선의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당쟁'이라는 단어가 익숙할 것이다. 조선의 정치가들은 패를 나누어 당을 이루었고, 그들 사이에는 당파 싸움이 치열했다. 이러한 당파 싸움을 '당쟁'이라 한다. 이 노랫말의 배경이 된 사건도 치열한 당쟁이다. 작가 신흠은 광해군 시절 '대북파'와 '소북파' 사이의 치열한 당쟁을 경험했다. 작가는 한때 높은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당쟁의 여파로 파직되어 귀양을 떠나기도 했다.


작가가 경험한 정치적 싸움은 너무나 처절하고 잔인했다. 그렇기에 작가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당쟁이 끝나길 원했다. 그 마음을 담아 지은 노랫말이 해오라기 노래이다. 이런 역사적 내막을 알고 노랫말을 읽으면 '한 물에 있으니'라는 구절이 예사롭지 않다. 좋은 나라를 꾸리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인데, 패를 나눠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랫말 속 화자의 태도이다. 화자는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강가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사람의 입을 빌려, 할머니가 손주에게 전할 법한 당부의 이야기를 넌지시 던질 뿐이다. 누군가의 실명을 언급하지도 않았으며, 당파 싸움의 비열함이나 잔인함을 폭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새와 물고기의 이야기를 꺼내 무던하게 툭 한마디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신랄한 비판보다 잔잔한 충고 한마디가 더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흠의 노랫말과 닮은 조선후기의 시조가 있다. 돌려 말하기를 할 때 가장 만만한 것이 동물이다. 이번에는 두꺼비와 파리, 그리고 송골매의 이야기이다. 이제 이런 노랫말을 읽으면, 동물들 속에 숨겨진 진짜 저격 대상을 짐작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두꺼비가 파리를 물고 언덕에 위에 앉아 있다. 두꺼비는 힘으로 파리를 제압했다. 파리를 입에 문 두꺼비는 약육강식 동물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파리 앞에서는 두꺼비가 강자지만, 송골매 앞에서는 약자이다. 두꺼비는 송골매를 보자 가슴이 내려앉아 자빠지고 만다. 그리고 송골매가 사라지자 두꺼비는 혼잣말을 남긴다. 이 혼잣말이 노래의 하이라이트이다. 두꺼비는 '날랜 나이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넘어져 멍이 들 뻔했다'고 말한다. 송골매를 보고 작아진 가슴은 사라지고, 두꺼비는 다시 허세로 가득 찼다.

이 시의 작가도 동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 노래를 지었을 리 없다. 우스꽝스러운 '두꺼비'를 통해 누군가를 저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파리 앞에서는 당당하지만 송골매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허세로 가득 찬 두꺼비는 과연 어떤 인물을 저격하는 것일까.

이 시조는 조선후기 부패한 탐관오리를 꼬집는 노래로 알려져 있다. 힘없는 민중들을 괴롭히지만 자신들보다 높은 중앙 관리 앞에서는 힘을 못 쓰는 탐관오리.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비열한 부류들을 꼬집는 것이다. 작가는 그들을 꼬집기 위해 돌려 말하기를 택했다. 정면에서 강하게 쏘아 대는 것보다, 노래 하나를 넌지시 건네는 것이 그들을 더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과 무딘 칼이 있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날카로운 칼이 더 치명적이라 생각한다. 반면 빨리 끓어오르는 양은 냄비와 오래 끓여야 뜨거워지는 뚝배기가 있다고 치자. 추운 겨울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택할까. 사람들은 뚝배기를 택할 것이다. 양은 냄비의 강렬함과 날카로움 대신, 무딘 뚝배기를 택할 것이다. 뚝배기는 오랫동안 공들여 데워야 하지만, 그 온기는 오래도록 유지되기 때문이다.

말이나 글도 마찬가지이다. 직설적인 말은 순식간에 날아와 비수가 되어 꽂힌다. 그 상처는 강렬하다. 하지만 무딘 칼도 꽤 아프다. 오히려 방심하고 있다가 무딘 칼에 베이면 그 상흔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옛 시인들은 이러한 효과를 노린 듯하다. 물론 대놓고 상대를 저격하기 어려워 돌려 말하기를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직설보다 더 큰 돌려 말하기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 은근히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며, 동물들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며 시치미를 떼며 오래도록 지속될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때로는 무차별적인 융단폭격보다 무심코 던진 은근한 한마디가 더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다.

[전현선 양주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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