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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20일 금요일
붉은 감에 그리움 담아…조선 문장가 박인로의 효심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면 적어도 열에 서넛은 먹는 장면이다. '먹는 것'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다른 사람이 먹는 영상을 왜 보느냐'는 질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먹는 영상'에 열광한다.
음식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충족시킨다. 맛있고 자극적인 음식은 감각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음식이 주는 의미가 '욕구 충족'만이 전부일까. 이보다 조금 더 심오하고 고차원적인 무언가는 없을까. 우리는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음식을 통해 '먹을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다양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조의 화자는 백이와 숙제를 원망하고 있다. 백이, 숙제는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충신(忠臣)의 대표다.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이 모시던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새로운 임금을 거부한다. 그리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었다고 한다. 충성심을 말할 때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그런데 이 노랫말의 화자는 고사리를 캐 먹은 이들을 나무란다. 고사리가 새 임금의 땅에서 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먹는 행위는 배신의 행위다. 이 시조의 고사리는 단순한 음식의 의미를 넘어선다. 충성심이나 배신과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
'조홍시가'라 불리는 조선시대 박인로의 시조다. 화자는 쟁반 위 탐스러운 감을 바라보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식욕이 돌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화자는 기뻐하지 않고 슬퍼한다. 중국의 옛 고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의 육적이란 사람이 부잣집 상에 차려진 귤을 보고 너무 먹고 싶지만, 부모님을 생각해 옷 속에 숨겨서 가져가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화자는 감을 보고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자신도 부모를 위해 옷 속에 감을 품어가고 싶지만 반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은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이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자신에 대한 후회 같은 것들이 섞인 음식이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시를 남긴 '백석' 시인의 '국수'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이 시는 작가의 고향인 평안도 지역 방언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지금 남한에 사는 우리로서는 해석이 어렵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말이기 때문에 선명하지 않아도 대략적인 의미는 통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빠지게 하고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한다. 짐작대로 이것은 시의 제목인 '국수'다. 이 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국수'를 먹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상이 '국수'라는 것을 알고 나면 어려운 사투리도 대략 이해가 간다. 아빠 것은 왕사발에, 아들 것은 새끼사발에 담겨진 이 국수는 '먼 옛적 큰 아바지'와도 같다. 그냥 큰아버지도 아니고 '먼 옛적' 큰아버지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국수를 먹는 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고향의 풍경인 것이다. 이 반가운 것은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하다. 또한 국수를 먹는 날이면 온갖 냄새가 난다. 어른들의 담배 냄새, 나무 타는 냄새, 수육 삶은 육수 냄새. 이 온갖 냄새들이 만들어 내는 고향의 모습. 그 자체가 국수인 것이다.
여기서 국수는 단순한 음식의 의미를 넘어선다. 평안도 방언이 가득한 이 시의 '국수'는 국권 상실의 시기에 화자가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강압 속에서 고향 사투리를 가득 채워 설명하는 이 음식은 '우리의 민족 문화' 그 자체다. 평안도 지역에서 가족끼리 둘러 앉아 국수를 먹는 장면을 이 시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확실하게 화자가 느낀 고향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노랫말이다.
맛있는 음식은 가장 빠르고 단순하게 행복을 얻는 수단이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다른 생각은 잊고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음식'을 식욕 충족 수단이라고만 생각하면 너무 단순하고, 무언가 아쉽다. 문학 작품에서 음식은 단순한 먹을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전이든 현대든 음식은 다양한 노랫말 속에서 식욕 충족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음식을 통해 다양한 감정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 이것 또한 문학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현선 양주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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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