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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2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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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땅 되찾겠다˝…묘청의 서경천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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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고려 왕궁 터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개경의 고려 왕궁 터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올여름에 서경의 대화궁 근처 30여 곳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곳이 길지라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 재난을 피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까?" (김부식)

"서경 임원역의 땅은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우시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금나라가 폐백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하는 것은 물론, 36개 나라가 모두 복종할 것입니다."(묘청)



서경은 언제부터 북진정책의 상징이 되었을까?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가까운 시일 내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으로 옮길 것을 선언합니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하였고 '훈요 10조'를 통해 훗날의 고려 왕들이 매년 100일 이상 서경에 머물며 정치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태조가 죽은 뒤 서경 천도가 다시 추진된 것은 그의 셋째 아들 정종의 즉위 직후입니다. 왕건 사후 왕위 계승 다툼에서 정종은 서경 주변 호족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서경유수 왕식렴과 평주의 박수경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궁궐을 짓는 도중에 정종이 죽으면서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서경을 중심으로 추진된 북진정책은 윤관의 여진 정벌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예종 2년(1107년) 왕명을 받은 윤관은 별무반 등 고려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함경도 방향으로 진출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년 뒤 여진족의 간청으로 동북 9성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묘청은 왜 서경천도를 주장했을까?

여진족은 고려가 되돌려준 영토를 토대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동북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우고 20년도 안 되어 거란족을 멸망시키고 나아가 중국 송나라의 수도를 함락하며 송나라를 양쯔강 이남으로 몰아냈습니다. 강력해진 금나라는 고려에도 압박을 가하며 형제관계를 요구한 데다 '군신관계'까지 바랐습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부모의 나라로 고려를 섬겼던 여진족이 사대할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에 고려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하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집권세력 '문벌귀족'은 음서제도와 공음전 제도를 통해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을 거의 독점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문벌귀족의 대표였던 경원 이씨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굴욕적으로 금나라를 섬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백관회의에서 대부분의 신하들이 금에 대한 사대를 반대하였으나 이자겸은 사대를 결정하였고, 이 무렵 금나라의 공격에 남쪽으로 밀려난 남송이 대규모 사신을 보내어 협공할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하였습니다.

왕보다 강력했던 이자겸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이자겸의 난을 통해 개경의 문벌귀족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왕(인종)은 적극적으로 서경 세력과 손잡게 됩니다. 정지상, 백수한, 묘청 등 서경 세력은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산세와 지세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하는 설)을 내세워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국제 정세가 다시 한번 크게 변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금나라가 송나라 명장 악비 등의 반격으로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더 이상 고려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인종 8년 이후 금나라의 위협이 크게 줄어들자 인종은 금나라를 자극하는 서경 천도에 소극적으로 변했고, 결과적으로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 문벌귀족이 득세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리한 상황을 파악한 묘청 등 서경 세력은 강제로 서경 천도를 추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김부식 등 개경파 문벌귀족들에게 1년 만에 식량 부족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왜 강조했을까?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한 뒤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의 문벌귀족들은 공식적으로 고구려계승의식과 북진정책을 포기합니다. 고려를 안정적으로 장악한 문벌귀족에게 북쪽의 강력한 북방민족과 싸우는 북진정책은 어쩌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진정책을 포기하려면 고구려 계승 의식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진을 했던 것이기에 고구려 계승을 유지하면 북진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김부식은 이때부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남쪽의 신라를 계승했다는 '신라 계승 의식'을 강조합니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신라 계승 의식을 보여주기 위해 그 유명한 '삼국사기'를 썼습니다.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이때 우리 역사가 크게 변했다고 주장합니다. 원래 고구려, 발해 등 강력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자주적인 묘청이 사대적인 김부식에 의해 패배하면서 약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그의 책 '조선상고사'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지난 1000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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