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5년 01월 20일 월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1940년 광복군 창설,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워

170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약한 광복군.  국가보훈처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약한 광복군. 국가보훈처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전을 계속하여 왔다.… -김구, 한국광복군선언문 중 일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김구 주석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지청천 사령관 이하 광복군 임원, 중국 국민당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한국광복군' 창설이 국내외적으로 공표되는 순간이었다.

 

한국광복군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중국 내륙으로 거세게 쳐들어왔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에 밀려 계속 후퇴하는 상황이었고, 전시체제에 돌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중국 정부와 함께 충칭까지 후퇴하였습니다.

1940년 5월 김구는 중국 국민당 장제스를 만나 광복군 설치에 대한 승인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체제를 정비하면서 자신의 군대, 한국광복군을 준비합니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은 대표적인 독립군이었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발행된 신한민보는 '광복군 조직은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큰 사건'이라며 '힘이 있으면 힘을, 돈이 있으면 돈을 내자'며 모금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1941년 중국 내륙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무장단체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중국 공산당 지역인 연안으로 이동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놀란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에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1941년 10월)을 강요하여 이때부터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중국 정부의 한국광복군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후방에서 훈련만 계속되는 상황에 실망한 광복군 지청천 사령관이 큰 화를 내며 자신의 책상을 엎은 사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1943년 6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영국군 동남아전구 총사령부 대표 콜린 매켄지 사이에 상호군사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광복군은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9명의 공작대를 선발하여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였습니다. 영국군 각 부대에 배속된 광복군은 임팔전투를 비롯해 비센푸르, 따마플, 만달레이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였고, 1945년 7월 일본군이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거의 2년여 동안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편성한 한국광복군의 소임을 최전선에서 구현한 '유일한' 부대이기에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광복군은 미국과 어떤 작전을 계획했나요?

광복군은 미군과의 군사합작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 압력을 통해 '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을 폐기하고 결국 독자적인 지휘권을 확보했습니다. 1944년 5월 광복군 김학규는 미국 제14항공대 사령관 셔놀트 장군과 협의하여 6개 항의 공동작전에 합의하였습니다. 미국 전략정보처(OSS)가 광복군 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첩보활동을 실시한다는 이 계획은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렸습니다. 훈련을 지휘했던 미군 도노반 소장은 '오늘 이 시간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적 일본과 싸우는 공동작전이 시작된다'고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백범일지). 김구 주석은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 시 임정 요원의 동반을 미국에 제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미군의 필리핀 공격 시 맥아더가 필리핀 대통령, 고위 관리들과 동행함으로써 얻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은 두 단계로, 광복군 대원들을 잠수함으로 국내(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진입시켜 중요 지점을 파괴하거나 점령하는 작전이 1단계였습니다. 2단계는 광복군을 비행기와 선박으로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항복 소식에 급해진 김구와 임시정부는 급히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최대한 빨리 국내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의 군대가 가장 먼저 조선에 도착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긴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8월 18일 이범석 지대장을 비롯한 장준하, 김준엽 등 광복군 20여 명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입국 거부로 다음 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경제경영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