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5년 02월 13일 목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민중봉기 실패했어도 저항의 뿌리 남겼죠

124

새 세상 만들려했던 동학농민운동
탐관오리 판치던 전북 고부지역
수탈 당하던 백성들 들고일어나
농민탓으로 돌린 민씨정권 실책
동학농민군의 파죽지세에 놀라
청나라·일본 외세에 개입 요청
日의 경복궁점령·청일전쟁 비화
우금치전투 참패로 혁명 막내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압송 사진(왼쪽)과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압송 사진(왼쪽)과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

…성난 밀물처럼, 관아를 향해 달려 들어갔다, 울둘목, 그렇다, 목포에서 배 타고 제주 가본 사람은 알리라. 쏜살처럼 달리는 그 성난 밀물…관아는 텅 비어 있었다, 조병갑은 어젯밤 벌써 전주로 도망갔고…(신동엽, '금강' 중에서)

1967년 시인 신동엽은 4·19혁명에 감명받아 그의 장편 서사시 '금강'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백성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개항 이후 최대 민중 봉기였으며 결과적으로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배경이 됐던 동학농민운동. 반외세·반봉건 민족운동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Q. 동학농민운동이 왜 일어났나요?

A.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많은 개화파 인물이 죽거나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 민씨 정권은 청나라의 보호 속에서 아무런 견제 없이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고 민씨 정권과 결탁한 부패한 관리들이 백성을 심하게 수탈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표적인 탐관오리가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마을, 고부의 군수였던 조병갑이었습니다. 전라북도 고부 지역은 지금의 김제평야 일대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끝없는 지평선'이 이어지는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이곳의 수령으로 오기 위해 많은 관리가 뇌물을 바쳤습니다. 실제 발령받은 수령 중 3분의 1가량이 농민을 수탈하다가 삭탈관직됐다고 기록된 곳입니다. 흥선대원군 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조카였던 조병갑은 거금 7만냥을 바쳐 고부 군수가 됐다고 합니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해 새로운 만석보를 쌓고 그 사용료를 받았습니다. 또한 불효, 음행, 잡기 등 온갖 죄를 물어 백성들을 옥에 가두고 돈을 요구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의 공덕비를 세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이때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글을 적어 조병갑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병갑은 세금을 줄여달라는 부탁을 무시하고 전창혁을 감옥에 가두고 몽둥이로 모진 고문을 가해 죽이고 말았습니다. 몇 달 뒤 전봉준과 고부 백성들은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 동학농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Q. 조선 정부의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A.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의 대응은 안이했습니다. 안핵사(민란 처리를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가 사건의 원인을 농민에게 돌리고 전봉준을 비롯한 주동자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백산(전북 부안에 있는 낮은 언덕)에서 더 크게 봉기했고,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했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요충지였던 전주성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전주성 입성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전주성 바깥에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중앙군)이 있지만 만약에 그것이 뚫리면 한양까지 농민군이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조선 정부는 근현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잘못된 결정으로 꼽힐 만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혹시라도 농민군에게 권력을 빼앗길 가능성에 놀라 당시 대외적으로 의지하던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조선의 요청에 청나라 군대가 곧장 충남 아산만에 상륙하고 다음날 톈진조약에 의거해 일본 군대가 인천항에 상륙합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 자신들의 백성들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가 생각하지 못한 일본 군대의 상륙을 맞게 됩니다.

일본 군대의 상륙(5월 6일) 이틀 뒤 조선 정부와 동학농민군 간 화해의 약속이 체결됩니다(전주화약). 전주화약으로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돼 곳곳에서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개혁 조치를 추진하고 치안과 행정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집강소를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지방을 장악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발해 나주, 남원, 운봉의 수령이 집강소를 거부했지만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이 군대를 이끌고 수령을 위협해 집강소를 설치했습니다. 남원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부사 김용헌을 잡아 목을 매달기도 했습니다.

 

Q. 동학농민운동은 왜 실패하나요?

A. 전주화약으로 더 이상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그게 못마땅했습니다. 조선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일본은 조선의 개혁이 부족해 이런 일이 생겼다며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뜻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1894년 6월 군대를 동원해 조선 정부가 있는 경복궁을 무력 점령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던 청나라 군대를 향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가해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1894년 뜨거운 여름, 조선의 상황은 매우 위태롭고 복잡했습니다. 서해 바다와 육지 곳곳에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전투를 벌였고 한양에서는 일본의 강요로 갑오개혁이 시작됐습니다.

전라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동학농민군은 어땠을까요?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고 왕이 일본인들에게 겁박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에 나서게 됩니다. 이번에는 충청도 동학농민군까지 합세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모였습니다. 훗날 동경매일신문에서 동학농민군으로 왜 참여했냐는 질문에 농민 한 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고치고 조선에 있는 외국인들을 추방하여 백성들의 만복을 도모하고자 함이다."

동학농민군의 마음과 달리 기관총을 비롯한 우수한 서양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쉽게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우금치(충남 공주 금학동 일대)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고 패합니다. 여기에 동학농민군의 개혁 조치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던 양반들은 스스로 '민보군'이라는 군대를 만들어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은 외세의 개입과 일부 봉건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신분제 타파를 주장하고 봉건적 악습을 없애려고 했던 동학농민군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당시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개혁 운동의 흐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경제경영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