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 '신행'. 고려시대에는 결혼하면 자녀가 다 자라기 전까지 여성의 친정에 살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결혼을 하자마자 여성이 곧장 남성의 집으로 시집가는 것이 일반화됐다.
박유가 "지금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나 한 아내만 둘 수 있어 아들이 없는 자도 첩을 둘 수 없습니다. … 청컨대 여러 신하, 관료로 하여금 여러 처(부인)를 두게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 부녀자들이 그걸 듣고 모두 원망했으니 … 연등회 날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저놈의 늙은이이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 당시 재상 중에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대부경 벼슬을 지낸 박유가 축첩제(첩을 두는 제도) 시행을 건의했으나 당시 여성들이 항의하고 재상들도 자기 부인을 두려워해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는 고려사 기록이다. 일부일처(一夫一妻)가 일반적이었던 고려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왕을 호위하는 신하를 향해서도 공개적으로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고려의 여성들은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했다.
Q.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는 어땠나요?
A. 여성이 왕을 했던 신라의 사례처럼 고대부터 여성의 지위는 조선 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여주이씨세보'에 나오는 고려시대 호적을 보면 죽은 남편을 대신해 낙랑군 부인 최씨가 가정의 호주(戶主)로 올라 있습니다. 당시 34살이던 첫째 아들이 있었음에도 가정의 호주는 어머니 최씨였으며 최씨를 기준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여성이 호주가 됐다는 것은 여성 호주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가 사회적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76년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도 족보에 아들딸 구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자녀를 적었습니다.
재산 상속 및 제사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신집권기 경상도 안찰부사였던 손변은 "자식에 대한 부모 마음은 균등한데 어찌 다 커 결혼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린 아들에게는 박하겠는가"라며 재산을 상속한 누나를 설득해 남동생에게도 재산 절반을 나눠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딸 역시 부모 봉양과 사후 제사를 균등하게 책임졌습니다. 절에서 부모나 조상의 제사를 모시면서 제사 비용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부담했고 외손자가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여성이 혼인한 후 친정에서 살다가 자녀들이 모두 성장한 뒤에 남편의 집으로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 장인의 집으로 가는 '장가 가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여성이 곧장 남편의 집, 시집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말 그대로 '시집 가다'가 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비교적 재혼이 자유로웠습니다. 조선과 달리 재혼한 여성의 아들이 관직으로 나가거나 승진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우가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아이 딸린 과부(상장군 대집성의 딸)와 재혼을 합니다.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남성, 여성 모두 가능했습니다.
고려시대 음서의 혜택은 아들, 손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위나 외손자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장인어른이 5품 이상의 고위 관리라면 과거 시험 없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공을 세우면 그 사람의 부모뿐만 아니라 장인과 장모까지 함께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Q. 여성의 지위는 언제부터 변하나요?
A.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윤리관이 확산되면서 남성 중심의 가족 윤리가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삼종지의가 있는 것이며, 재혼하는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태종실록), "세 남편에게 시집간 여성의 자손은 언관직과 판관직에서 제외해야"(세종실록)' 등의 기록이 나오더니 결국 조선의 경국대전에 재혼(재가)에 대한 불이익이 명문화됩니다. "재가한 자는 봉작하지 말고, 세 번 재혼한 여성의 경우에는 절개를 잃은 것으로 간주하여 자손은 관직의 제수를 허락하지 않고 과거 응시도 불허한다."(경국대전)
조선 전기에 여성의 재가를 막는 법이 시행됐지만 실제 백성의 풍습에서 여성의 지위는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6세기 대유학자 이이도 어린 시절을 외가였던 강릉에서 자랍니다. 아버지 이원수가 아내 신사임당 집안에서 사실상 데릴사위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신사임당 집안에 비해 이원수의 집안은 한미하여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살면서 큰소리를 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1476년에 쓰여진 안동 권씨 성화보. 아들딸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을 적었다.
Q. 임진왜란 후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낮아지나요?
A. 조선 건국 이후 확산되던 성리학적 윤리관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확고하게 자리 잡습니다. 성리학 기본 서적이었던 소학의 내용이 실제 생활에까지 영향을 많이 줬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재산 상속과 제사는 장자 중심으로 재편됐습니다. 먼저 여성들이 그 권리를 잃었고 이후에는 장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도 차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아들(장자)이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했고 제사 역시 장자의 몫이었습니다. 처가에서 딸에게 상속한 재산이 있더라도 남편 허락 없이 아내는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먼 친척 집에서 양자를 들여 부모 봉양과 제사를 맡도록 했습니다.
소설 '흥부전'에 나오는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 모신다고 호위호식 잘사는데… '라는 구절은 놀부가 큰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든 재산을 차지하고 동생인 흥부가 차별을 받았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18세기 이후 '서학(천주교)'이라는 서양 종교가 평등을 강조하며 확산됐을 때 평소 불평등을 많이 느꼈던 조선의 여성들이 많이 참여한 것도 당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해될 것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여성의 재가가 허용되면서 이 땅의 여성들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