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5년 02월 13일 목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조선 효종이 청나라를 치려고한 진짜 이유

122

청나라의 신임 컸던 소현세자
인조는 정적으로 생각해 박대
소현세자 죽고 왕위 오른 효종
취약한 정통성에 '북벌' 주장
최강국 淸과 싸움은 비현실적
'나선정벌'로 공격대신 淸지원

병자호란 직후 청의 강요로 세운 삼전도비(현재 송파구 잠실).

"…사로잡힌 백성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말하길,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니 (청나라로) 끌려가는 사람의 수가 만 명에 달하였다."(인조실록)

명나라와 후금(훗날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정책(명나라를 가까이 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금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침입했다(정묘호란). 9년 뒤 더욱 강력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나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과 신하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머나먼 청나라 땅으로 끌려갔다.



Q. 병자호란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A. 1636년 병자호란은 조선의 왕과 사대부, 백성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을 계속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던 관군과 의병이 연이어 패배했다는 소식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는 당시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호수 옆)에 나아가 청나라 태종 앞에서 '삼궤(배)구고두(三궤(拜)九叩頭)'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삼전도의 굴욕). 삼궤구고두는 청나라의 항복의식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대며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9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를 무식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인조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큰 치욕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항복 조건으로 왕자들과 일부 신하들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신하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갑니다.

Q. 인조와 소현세자는 왜 사이가 좋지 못했나요?


A. 25세에 부인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8년간 인질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중간 역할을 수행합니다. 스스로 청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청나라의 권력가 도르곤(청 태종의 이복동생)과 가깝게 지내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청나라의 강력한 힘을 실감한 소현세자는 청나라 관리들과 교류하며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만나 천문학, 수학 등 서양의 지식을 배우고 서양의 여러 서적을 수집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청나라는 수시로 인조 대신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압박을 주었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명나라 신하 범문정은 조선의 왕을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 인조에게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정치적 경쟁자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화포와 천리경(망원경), 서양 서적 등을 갖고 귀국했으나, 인조는 세자의 물건들을 모두 불태우게 하고 계속 박대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뒤 건강했던 소현세자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습니다. 죽은 소현세자에 대한 당시 기록을 보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붉은 피가 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 마치 약물에 중독이 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인조실록)

Q. 효종은 왜 북벌을 주장했나요?

 


A. 소현세자가 죽고 그 아들들이 유배를 당했다고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자리가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현세자가 죽자 청나라에서 그와 친했던 청나라 군부 최고 실력자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청나라로 데려가 키우겠다고 인조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청나라는 인조의 묘비문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며 조선에 압력을 가했고 압록강 근처에 청나라의 군대까지 대거 배치하여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습니다.



효종이 왕이 되었으나 아직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석견)은 제주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형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동생이 왕이었던 상황은 조선 초기에도 있었습니다. 세종의 첫째 아들 문종이 일찍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즉위했으나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형의 아들(단종)을 끌어내고 스스로 왕(세조)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조는 정통성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효종 역시 형의 아들(이석견)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왕으로 즉위한 인물입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약점을 갖고 있던 효종은 즉위와 동시에 북벌을 주장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의 은혜를 갚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되갚아주자는 북벌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나라 안의 정치세력은 외적에 맞서 단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당장 청나라와 전쟁을 할 것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도 왕의 정통성, 소현세자의 아들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효종은 죽을 때까지 10년간 북벌의 깃발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Q. 실제 북벌이 추진될 수도 있었나요?

 


A. 당시 북벌은 실현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던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순치제에서 강희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점점 강해지는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실학자 박지원은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과 어영대장 이완의 대화를 통해 북벌의 허구성과 당시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꼬집어 비판합니다.

북벌 주장이 한창이던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도리어 북쪽에서 등장한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해 조선에 병력을 요청합니다. 북벌을 주장하던 효종은 '나선정벌'(1654년, 1658년)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조총 부대를 두 차례에 걸쳐 파견하여 오히려 청나라 군대를 도와주었습니다. 곧 공격할 나라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이 정말 북벌의 의지가 있었는지 되묻게 됩니다. 효종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현종이 즉위합니다. 효종만큼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 민감하지 않았던 현종은 북벌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현종의 아들 숙종 때 북벌이 논의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집니다. 마침 청나라에서 옛 명나라 장수들의 반란(삼번의 난,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이 크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는 숙종을 설득하려다 도리어 사약을 먹고 죽게 됩니다. 청나라에 미움받을 필요가 없었던 숙종에게 할아버지 효종과 달리 북벌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경제경영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