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진 연구원
입력 2025-04-28 09:07teen.mk.co.kr
2025년 05월 10일 토요일
판화가 울퉁불퉁하네, 무슨 기법이지?
박현진 연구원
입력 2025-04-28 09:07박수근 화백의 대표작인 ‘길가에서'와 ‘빨래터'의 디지털판화 작품을 카메라로 찍은 모습으로 울퉁불퉁한 질감까지 표현되어있습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곧 봄의 끝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5월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오늘은 따뜻하고 몽글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미술 전시회에 다녀왔는데요. 바로 '박수근 판화 특별초대전'입니다.
박수근 화백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화가로 그의 작품은 미술 교과서에도 항상 실릴 만큼 매우 유명하답니다. '길가에서'나 '빨래터'는 다들 한 번쯤은 보셨을 유명한 작품들인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박수근 화백의 대표 작품들을 디지털판화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디지털판화가 도대체 뭐야?
여러분, 미술 수업 시간에 다들 판화 실습은 해보셨나요? 저는 고무 판화 틀이나 왕 지우개를 조각칼로 열심히 파내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박수근 판화전에서는 24점의 회화 작품과 8점의 목판화 작품이 전시됐는데요. 회화 작품들은 모두 '디지털판화' 작품입니다.
디지털판화는 쉽게 말해 '원본 작품을 디지털로 복제한 작품'인데, 단순히 프린터로 복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디지털판화에는 '에디션 넘버'라는 게 존재하는데요. 저작권 협조를 받은 원본 작품을 제한된 수량으로만 복제해 유통하는 것입니다. 2022년에 박수근 화백의 자제분들과 연구소의 동의하에 30개만 만들고 더 이상 찍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하네요.
전시장 입구에 판화의 표면을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그림이 걸려 있는데, 저도 너무 신기해서 오랫동안 쓰다듬고 있었답니다.
울퉁불퉁 그림 기법은 미스터리?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은 화강암 표면과 유사한 울퉁불퉁한 질감으로 유명한데요. 물감을 여러 겹 쌓아 올린 마티에르 기법 중 하나라고 하더라고요. 디지털판화로 이런 울퉁불퉁한 질감까지 살렸다고 하는데, 정말 놀랍지 않나요?
충격적인 사실은 박수근 화백의 이 그림 기법을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박수근 화백은 51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제자를 양성하지도 않았고 자녀분들도 어릴 때라 정확한 기법 전수가 되지 않았다고 해요.
이에 화가로 활동하는 박수근 화백의 자제분들이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을 열심히 연구하고 계신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그 느낌까지는 살리지 못했다고 해요. 한국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그림 기법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한 점은 대한민국 문화계의 큰 손실인 것 같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울퉁불퉁한 판화의 표면을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디지털판화가 걸려 있습니다.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시대상
박수근 화백은 정감 가는 모습들을 주로 그림에 담았는데요. 1950년대 골목길의 풍경, 빨래터의 모습, 나무와 사람 등 따뜻한 느낌의 일상을 가득 담은 그림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박수근 화백이 그린 그림들의 배경은 그다지 따뜻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일하는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한국전쟁으로 인해 젊은 남성들이 많이 죽고, 여성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암울한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에 소쿠리를 이고 가는 여인들이나 장기를 두며 노는 노인들의 모습이 젊은 남성들의 모습보다 더 많이 등장했던 거죠.
더 깜짝 놀랐던 것은 '길가에서'라는 작품에 나온 아이를 업고 있는 소녀가 실제 박수근 화백의 따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어른들은 일하느라 바빴고, 아기를 돌보는 건 조금 더 자란 다른 아이의 몫이었던 거죠. 따뜻한 감성이 느껴지는 그림에서 이런 차가운 현실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게 조금 씁쓸하네요.
위작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2024년
박수근 화백은 과거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 있었던 만큼 위작 논란이 많았던 화가 중 한 명인데요. 2024년 LA에서 열린 전시회에선 전혀 처음 보는 이상한 작품이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라고 전시됐습니다. 박수근 연구소 등 미술 관계자들이 항의했지만 LA 미술관 측은 이를 무시했고, 큰 문제로 불거졌습니다.
공식적인 절차로 민원을 넣자, 그때 서야 위작 판별 과정을 거쳤는데요. 그 이후에야 전시회에서 문제의 그림들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미술 업계가 세계적으로 낮은 위상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 사례죠.
그 어려운 시절에도 박수근 화백은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카메라 사진으로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이 박수근 화백이 그린 모든 작품이 담긴 사진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정말 다행입니다. AI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여러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는 현재에 아주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림을 감상할 때는 마음 가는 대로
학생 여러분, 문화생활에 있어 평소 그림 전시회나 미술관을 많이 방문하는 편이신가요? 보통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걸 더 어려워한다고 하는데요.
이번 전시를 기획한 '월간 미술 세계'의 담당자는 "미술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보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느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번 전시로 학생들이 미술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박수근 판화전은 박수근 연구소의 저작권 협조를 받아 '월간 미술 세계'의 주관으로 강남 멀버리힐스 갤러리 앨리에서 지난 4월 2일부터 16일까지 무료로 진행됐는데요.
다음 전시는 성북동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4월 24일부터 5월 10일까지 열린다고 하니 한번 방문해서 박수근 화백의 따뜻한 감성을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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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판화에디션넘버
디지털판화는 원화만큼은 아니지만 꽤 특별한 가치를 가진다고 합니다.
작품 왼쪽 아래에는 복제된 작품의 총 개수와 해당 작품이 몇 번째 복제된 작품인지가 쓰여 있는데,
이번 전시에 걸린 모든 작품은 "12/30"으로 30개 디지털 판화 중 12번째 작품입니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