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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02일 토요일

경제 공부 인문

˝용서하지 않겠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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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대원군은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先儒)를 제사하는 곳인데 이런 곳이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 대원군은 군졸을 불러 항의하는 유생들을 한강 너머로 몰아내었다.…… -박제형(근세조선정감)



조선시대 서원은 어떤 곳이었나

서원은 조선시대 사림(士林)이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지방의 사립 대학입니다. 국가에서 세운 학교로는 성균관(서울), 향교(지방)가 있었습니다. 서원에서는 서원 선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에 대한 교육 2가지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에 처음 서원이 세워진 것은 1542년 중종 때입니다. 당시 경북 풍기의 수령 주세붕이 그곳 출신의 유학자 안향(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고려의 유학자)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바로 '백운동 서원'입니다. 주세붕은 백운동 서원을 세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며, 교육은 성현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세붕 이후 이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 서원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왕은 인재를 키워낸다는 뜻을 담아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려줍니다. 소수서원은 국가로부터 넓은 토지와 노비, 책 등을 받으며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황은 '선비의 학문이 서원에서 힘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어진 인재 또한 서원에서 더 많이 배출된다'고 하였습니다.


연산군 시기부터 이어진 사화 여파로 지방 향교가 피폐해졌을 당시, 지방 서원은 중앙의 권력자나 수령의 견제를 피하고 각 지역 양반들이 유교적 향촌 질서를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서원은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가 인정돼 2019년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서원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을까

임진왜란 이후 전국 수백 곳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대부분의 서원은 왕이 내리는 현판과 함께 넓은 토지와 노비들을 받았습니다. 서원의 토지에는 세금이 없었고,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부역에도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양반들은 국가 지원을 받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은 사실상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는 뜻이기에 서원 양반들은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그 지역의 농민들을 수탈하였습니다. 서원의 제사 비용을 내지 못한 농민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반에게 불경하다' '부모에게 불효했다'며 백성들을 서원에 데려다 구타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미 수령의 수탈에 지친 백성들은 서원의 횡포에 다시 한번 몸서리쳐야 했습니다.

서원은 국가에서 세운 향교와 달리 여러 선현을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 중심으로만 제사를 지냅니다. 당연히 그 인물을 존경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의 집합지가 됩니다. 송시열의 제사를 지내는 화양서원과 윤증의 제사를 지내는 노강서원이 각각 노론과 소론 유생을 배출하는 학교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생들은 '내 스승이 더 훌륭하다'며 다른 붕당의 인물을 흠잡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중앙의 정치 세력들은 자신과 친한 서원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식을 활용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후기 서원은 붕당의 대립을 격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

서원의 난립으로 폐해가 날로 심각해졌습니다. 결국 국가 역시 서원에 대한 통제에 나서게 됩니다. 흥선대원군 이전에 서원을 크게 정리한 사람은 '영조'입니다. 영조는 허가 없이 세워진 서원들과 비교적 최근 지어진 서원을 중심으로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조 사후 다시 서원이 무분별하게 세워지면서 전국의 서원이 1000개를 넘기도 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지방 양반의 수탈 수단으로 전락한 서원을 대거 철폐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 도왔던 명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던 만동묘와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화양서원이 철폐되었습니다. 유생들의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이어졌지만 흥선대원군은 철폐된 서원의 신주를 땅에 묻게 하며 단호한 결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철폐한 서원 소유의 토지와 노비는 몰수되어 당시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괴롭히던 대부분의 서원이 철폐되면서 백성들은 크게 환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