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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요일

경제 공부 인문

이복동생 향한 이방원의 질투, 서얼차별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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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애니메이션 '홍길동' 속 한 장면과 '홍길동전' 표지. 한국영상자료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길동이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소인에게 평생 서러운 일이 있습니다. 대감의 정기를 물려받고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으니 아버지께서 낳아주시고 어머니께서 길러주신 은혜가 정말 깊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못하니, 소인 같은 인생을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홍길동전

 

조선 중기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첩의 자식(서얼)이었던 홍길동이 겪는 차별이 부당함을 이야기한다. 서얼 출신 이달에게 시를 배웠던 허균은 '인재가 필요한 시기에 서얼 출신이라며 그 재주를 쓰지 않는 것은 남쪽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며 서얼 차별을 크게 비판했다. 허균은 서얼 차별이 나라에 원망하는 백성을 많이 만들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봤다.

 

서얼은 어떤 사람인가요?

 

서얼(庶孼)은 서자(庶子, 양인 첩에서 낳은 자식)와 얼자(孼子, 천인 첩에서 낳은 자식)를 합친 말입니다.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그보다 낮은 양인 또는 천인이면 서얼이 됐습니다. 흔히 '첩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많이 불렸습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언제 본격화되나요?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 건국 직후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크지 않았습니다. 서얼을 차별하는 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방원) 때부터입니다. 원래 태조(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가 낳은 8번째 왕자(이방석)를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분노한 이복 형 이방원(훗날의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외할머니가 노비였던) 정도전을 죽이고 이방석을 제거합니다.

이방원은 새엄마라고 할 수 있는 신덕왕후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태조)가 만든 신덕왕후의 무덤(정릉)을 한양 안쪽(지금의 정동)에서 성곽 밖 지금의 성북동(정릉동) 쪽으로 옮겨버렸습니다. 또 신덕왕후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워버렸고 후궁의 예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태종이 첩의 자식을 차별하는 법을 만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서얼은 어떤 차별을 받았나요?

 

조선에서 부인의 아들(적자)과 첩의 아들(서얼)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얼은 적자의 자손을 윗사람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적자의 앞쪽에 앉을 수도 없었고, 감히 나란히 말을 타지도 못했습니다. 유형원은 '서얼이 적자를 섬기는 것은 어린이가 어른을 섬기는 예와 같다'고 기록했습니다(반계수록). 재산 상속에서도 서얼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서 서얼의 자손은 문과 응시가 금지됐고, 관직에 등용되더라도 상한을 두어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서얼은 통역, 의학, 법률 등 분야의 인재를 뽑는 잡과를 통해 관료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태종 때 대사헌 이은은 서얼에게 관직을 주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섞이게 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습니다.

 

서얼 차별을 완화하자는 주장은 언제부터 나오나요?

 

조선 중기 관료 김사악은 상소를 올려 '문재(文才)나 무재(武才)가 있는 서얼이 수십 만이 넘는데 벼슬길을 열어주지 아니하니, 이것은 그들을 인간에 끼워주지 않고 버리는 셈입니다. 하늘이 현능한 재주를 낼 때는 적자와 서얼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국가에서 사람을 쓸 때는 적자와 서얼에 구별을 두니 이 어찌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내는 뜻이겠습니까(명종실록)'라며 서얼 차별을 완화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이 부족했던 조선 정부는 납속(쌀 납부)을 통해 서얼이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우회적으로 허용했습니다.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던 영조, 사도세자의 죽음을 경험했던 정조는 적극적으로 서얼의 차별을 완화했습니다. 영조는 서얼도 '청요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이라 불리는 중요한 관직을 맡을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를 법률로 엄히 다스렸습니다.

정조는 서얼의 관직 등용을 허용하고 규장각에 서얼을 위한 관직을 마련합니다. 이에 따라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이 임명됐는데 그들이 바로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청장관전서' 저술), 유득공('발해고' 저술), 박제가('북학의' 저술)입니다.

19세기에는 수천 명의 서얼이 집단 상소를 올리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고 점점 서얼이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은 늘어났습니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서얼 차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