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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7일 토요일

경제 공부 인문

맥아더 장군은 왜 평양에 상륙하지 않았을까

38선까지만 작전 가능하도록
안보리 결의안에 명시됐기 때문
유엔군 38선 넘으면 참전 엄포한
중국 자극하지 않기 위한 목적도

전쟁 흐름 바꾼 인천상륙작전
이틀전 보도로 기밀유지 실패
美, 성공 가능성 믿고 진행시켜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설명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동의와 지원을 받았고,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미국이 참전할 경우 중국군을 파병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우세해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경상도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는 상황이 계속됐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곧 서울을 되찾고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길어지고 38선 부근에서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 측은 정전협정을 체결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Q. 소련은 유엔군 참전을 막기 위해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나요?

A.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갖고 있습니다.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안보리 결의가 통과되지 않습니다. 1950년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이제 막 공산 세력에게 패배해 타이완(대만)으로 쫓겨난 장제스 정부였습니다. 따라서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을 반대할 나라는 소련뿐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개최된 유엔 안보리에서 당시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는 유엔군 파병 결의안 표결에 기권했습니다. 소련은 결의안이 부결되더라도 미국이 참전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엔군 파병 결정이 내려지기도 전에 미국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에 미군(미 24사단 일부 병력)이 도착했고, 이미 전투(오산 죽미령전투)가 벌어진 뒤였습니다. 유엔군 파병결의안이 부결되면 미국은 유엔군이 아니라 미군의 이름으로 참전할 것이었습니다. 이후 24개국으로 이뤄진 유엔군 전력(16개국은 전투 병력 파견, 6개국은 의료 지원)의 약 90% 이상이 미국인 것을 감안하면 미국의 참전을 막을 수 없었던 소련 입장에서 유엔군 참전이 아주 나쁜 선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미군은 미국 대통령의 지시만 받지만 유엔군은 형식적으로 유엔 군대이기 때문에 이후 유엔의 결의에 구속되니까요. 실제 소련은 유엔군 파병 이후에는 안보리 회의에 적극 참여해 계속 거부권을 행사하며 유엔군 작전을 간접적으로 방해합니다. 그 결과 9월 29일 유엔군 사령부는 모든 유엔군 부대에 진격을 멈추도록 명령합니다. 결국 미국은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에 대한 결의안을 소련의 거부권이 없는 유엔 총회로 가져가 통과시킵니다. 그사이 북한군은 흩어진 부대가 속속 복귀하면서 재편성을 하고 방어선을 다시 만들 시간을 벌었습니다. 유엔군으로 참전할 때 갖게 되는 불편함을 뼈저리게 느낀 미국은 이후 전쟁에서 유엔군으로 거의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모두 유엔군으로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Q. 맥아더 장군은 왜 인천에 상륙했을까요?

A. 미국은 인천 외에도 전북 군산, 강원 주문진 등을 상륙 장소로 검토했습니다. 그 장소들은 모두 38선 이남의 지역이었습니다. 적의 배후를 치는 상륙작전이라면 왜 적의 수도 평양 방향으로 상륙할 생각을 안 했을까요?

유엔군 파병을 결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83호와 84호에는 '북한군을 북위 38도선(전쟁 이전의 상태)까지 철수시키기 위해 유엔 회원국의 군대(유엔군)를 파병하고 유엔군 지휘를 미국에 맡긴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파병 직후 유엔군의 작전 범위는 전쟁 이전 상태인 38도선 이남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8도선 바로 밑에 있는 인천이 가장 유력한 상륙 장소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은 인천에 대규모 병력이 상륙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불과 5년 전인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의 대규모 병력이 인천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서해안과 인천의 지형, 특징 등을 적은 자세한 보고서를 미국은 갖고 있었습니다.

중국 반응도 중요했습니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성명을 통해 '유엔군이 만약 38선을 돌파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며 중국의 참전을 직접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이틀 뒤 주베이징 인도대사를 통해 '만일 한국군만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의 참전은 없겠지만,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국이 참전할 것'이라고 전하며 이 내용을 미국에 전달하도록 부탁했습니다.

Q.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현실과 비슷한가요?

A. 인천상륙작전은 소설, 영화 등으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 내용은 흥미를 위해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지상 최대의 비밀 작전'으로 나오는데,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 비밀 작전은 맞지만 어이없게도 인천상륙작전은 작전 이틀 전 9월 13일 AP통신을 통해 '유엔군이 15일 인천으로 상륙하기 위해 이동 중이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한다'는 보도가 나옵니다(AP통신 기자에게 정보를 노출한 김근배 소령은 그 일로 직위 해제됩니다). 중국에 유엔군의 인천 상륙에 대비하라는 권고도 있었습니다.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도 이미 상륙작전의 비밀이 노출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북한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8월 14일 전투명령 72호를 통해 '107연대를 창설하고 방어 임무를 부여한다', 8월 26일 기록을 보면 '적이 해안에 상륙을 기도하고 있다' '8월 28일까지 부평, 영종도, 강화도, 남양만 등에 군대를 배치하고 섬과 해안선에 적의 상륙을 허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8월 28일 전선지구경비사령부는 인천방어지구사령부로 변경됐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그 작전을 알더라도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집중된 병력을 대거 이동시킬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확률이 5000분의 1도 안 되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큰 방향을 바꾼 중요한 군사작전이지만 무리하게 불가능한 수준의 작전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정부와 맥아더 장군이 어렵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하고 필요한 작전이기에 작전이 노출됐음에도 진행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