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4년 05월 03일 금요일

경제 공부 인문

˝하나의 세계 깨뜨려야 태어나˝…소년의 성장통

154

헤르만 헤세 데미안

사진설명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과정은 지나고 나면 한 발을 떼는 통과의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 겪는 이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의 이치는 낯선 만큼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은 그 성장의 고통과 깨달음을 예민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뚜렷한 기승전결을 갖춘 잘 짜인 구조가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읊조리듯 나열되어 있지만 하나하나 곱씹게 만드는 날카로운 문장들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모범적인 기독교 가정의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10세 소년이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불량 학생 크로머 무리와 어울려 놀던 어느 날이었다.

싱클레어는 나쁜 짓을 자랑삼아 떠벌리는 일에 지고 싶지 않아 과수원 사과를 훔쳤다는 이야기를 꾸며낸다. 이때부터 거짓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크로머로부터 돈을 요구받는 괴롭힘이 시작된다. 그 시절 그는 "일종의 착란으로 집안의 정돈된 평화 한가운데서 소심하게 그리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왔다.

 

사진설명
헤르만 헤세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로 또래답지 않은 성숙한 모습의 데미안이 전학을 온다. 둘은 수업 시간에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데미안은 카인이 남달리 뛰어난 인물이기에 악인으로 낙인 찍힌 것이라는 말을 던진다. 평범한 아벨의 세계를 살던 싱클레어는 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비판적 사고에 눈을 뜬다. 데미안은 계속해서 유혹적인 금기의 세계를 보게 만든다. 카인과 아벨, 선과 악, 그리고 여전히 크로머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데 몰려와 싱클레어의 꿈을 어지럽힌다.

그날은 크로머의 존재를 데미안이 눈치챈 날이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문답에 정작 그 비밀은 감추어져 있지만 데미안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크로머는 거짓말처럼 싱클레어의 삶에서 사라진다.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데미안이 완수한 기적 앞에 마냥 고마운 감정이 아닌 내면의 거부가 기이하게 뒤섞인다. 크로머에 대한 예속을 새로운 의존으로 대체하더라도 아벨이 누렸던 신의 호의로, 그리웠던 밝은 세계로 달려가고 싶다.

그 길에 악마로부터 그를 구한 구원자도, 새로운 세계로 그를 이끄는 유혹자도 잊고 싶다. 크로머에게 무얼 했는지에 대해 카인의 세계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는 욕망도 억제한 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거리를 두게 된다.

몇 년 후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수업을 들으며 다시 가까워진다. 데미안은 크로머와의 일을 아주 살짝 암시하는 일조차 없었다. 함께 하는 수업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둘은 성서의 내용을 수업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보다 개인적으로 보다 유희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했다. 오로지 말을 늘어놓기 위한 대화가 아닌, 더없이 결합되기도 하고 서로의 생각을 의심하고 저항하기도 하며 사고를 확장해나갔다. 통찰은 가혹한 떫은맛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섬에 있는 듯한 데미안의 서먹한 태도에 싱클레어는 한없이 고독해지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쳐 한 뼘 자란 싱클레어는 유년 시절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들이 폐허가 되어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간다.

데미안은 이후로도 싱클레어 인생의 분기점마다 나타나 조력자이자 안내자이자 또 다른 나 자신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 하나씩 존재할 법한 유형인 알폰스 베크,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에바 부인까지 싱클레어에게 의미 있는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데미안과 연결된다. 싱클레어는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대학생이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전쟁이 시작되고 부상을 입고 누워 있는 그의 눈앞에 데미안이 보인다. 데미안은 그 사건 이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그 이름 "프란츠 크로머 아직도 기억해?"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어 말한다. "크로머에 맞서든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넌 너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정혜재 매경출판 기획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