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통장 만들려면
은행 방문해 날짜 예약
서류 인쇄·도장은 필수
혁신 요원했던 日금융
팬데믹 거치며 대격변
비대면·디지털 대세로
"고객님,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하시려면 도장을 찍어주시기 바랍니다."
은행에서 현금을 뽑는 데 도장이 필요하다고요? 스마트폰 하나로 입출금부터 통장 개설까지 모두 가능한 디지털 시대에 도장을 들고 은행에 가는 모습은 상상이 잘 안 가실 텐데요. 옆 나라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도장이 통장 개설이나 현금 입출금에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한국은 빠른 인터넷 속도와 모바일 기술의 발전 덕분에 금융 서비스가 디지털화된 지 오래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절차가 간소해졌고, 소비자들은 모바일 앱에서 간편 비밀번호와 생체 인증만으로 모든 금융 거래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본 도쿄에서 직접 경험한 일본 금융 시스템은 아날로그에 가까웠고 여전히 대면 상담, 종이 문서, 도장, 현금 선호 등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통장을 만들려면 가장 먼저 은행을 방문해 접수 날짜를 예약하고, 예약한 날짜에 필요 서류를 전부 인쇄하고 도장을 휴대해 재방문해야 했습니다. 은행에 가더라도 통장 신청부터 발급이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서류 접수 후 대기, 서류 확인 및 통장 디자인 선택 후 대기, 통장 비밀번호 설정 후 대기 등 무한 대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일본이 아날로그 방식의 금융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뢰와 안정성을 강조하는 일본 문화 특성상, 오랜 기간 지속된 전통과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금융 시스템이 구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잦은 자연재해를 경험해온 일본 사람들은 금융 결제 시스템이 마비될 위험을 우려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확실한 현금 거래와 현금 보유를 선호합니다. 또 모바일이나 인터넷뱅킹보다는 은행 직원과 직접 소통하고 관계를 쌓을 수 있는 대면 상담을 더 좋아합니다. 금융기관 역시 거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꼼꼼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고 종이 문서와 도장 등을 통해 업무 근거를 남기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금융 소비자들이 은행에 직접 방문해 통장을 관리하고, 도장을 찍고, 현금을 손에 쥐고 거래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 금융시장에서도 디지털 전환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모바일뱅킹, 온라인 결제 시스템 등 비대면 서비스 이용이 늘어나면서 젊은 소비자층을 중심으로 아날로그 선호, 현금 선호 문화가 약해진 것입니다.
일본 대형 은행들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도장, 종이 서류 중심의 업무에서 벗어나 스마트폰, 태블릿PC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일본 최대 금융사인 미쓰비시금융그룹은 2025년까지 계좌 개설, 입금 등 업무 절차의 70%를 태블릿 등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도장이나 종이통장이 필요 없는 계좌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미즈호은행도 송금, 계좌개설 등을 태블릿으로 쉽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신한은행의 일본 현지 법인인 SBJ은행은 일본 최대 SNS 플랫폼 라인과 제휴해 다양한 비대면 상품·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부동산 대출 상품은 신청부터 시행까지 전면 비대면화해 경쟁력을 높였습니다. SBJ은행은 자회사 'SBJ DNX'를 설립하고 인터넷·모바일뱅킹 시스템을 개발해 일본 현지 금융기관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일본 현지 금융기관들은 디지털 인프라스트럭처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자체 뱅킹시스템을 운영하지 못하고 정보기술(IT) 회사에 외주를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외주는 운영 비용이 많이 들고 급변하는 금융시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SBJ은행은 틈새시장을 공략해 일본 현지 은행들에 디지털 노하우가 담긴 뱅킹 시스템을 제공하고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