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강원대학교 교수
입력 2024-09-27 09:23teen.mk.co.kr
2025년 01월 14일 화요일
추석의 다른 말은 중추절(仲秋節)입니다. 다시 말해 추석은 가을의 한가운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추석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유례없는 더운 날씨와 열대야로 많은 사람이 힘들어했습니다. 때아닌 늦더위로 추석이 전 같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무더위로 인해 추석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은 것은 사실이지만 명절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날씨 탓으로만 돌릴 순 없습니다. 산업과 시대 그리고 문화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명절의 의미와 기능이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전통과 문화를 담고 있는 추석과 같은 명절이 산업과 사회 구조 변화로 인해 그 의미와 풍속이 변모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대략 60%가 "이번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명절이 더 이상 조상과 가족을 생각하는 전통적인 행사가 아니라 여행이나 여가 활동을 하는 기간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과거 동서양의 주요 명절은 대부분 생산 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추석 역시 삼국시대 여성들의 길쌈놀이가 그 기원입니다. 여성들이 누에나 각종 식물에서 실을 뽑고 면직물을 생산하는 길쌈은 생활 필수품인 의복을 생산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와 같은 길쌈 대회를 마치고 나면 당연히 풍성한 음식이 준비됐고 대체로 이런 행사는 신이나 자연에 대해 감사하는 제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고 즐기는 일련의 과정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사회의 번영과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핵심 요건이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과 같이 번성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요인이 바로 협력과 공동체 활동인 것입니다.
산업이 성장하고 경제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분업과 교환이 필수적입니다. 오늘날 경제 시스템은 화폐 제도를 통해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즉각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금전적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대상들과 기꺼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폐가 발달하지 않았던 촌락 사회나 봉건 사회에서 공동체 내 분업과 봉사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과거 명절이나 축제는 자급자족 경제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휼 활동과 소득 재분배 기능도 함께 수행했습니다. 많은 명절이나 축제 속에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도록 유도하는 행사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화폐 제도가 고도로 발전한 현대 경제 시스템에서 과거와 같은 공동체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필요성은 전보다 감소했습니다. 이제 명절의 종교적·사회적 의의는 전만큼 크지 않습니다. 현대 명절의 주된 경제적 역할은 생산성 증대와 구휼 활동보다 소비 촉진으로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입니다. 매년 11월 말에 있는 블랙프라이데이는 원래 저소득층을 위한 자선과 구휼의 의미가 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요리를 먹고, 연말 크리스마스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선물을 나눌 수 있도록 물건값을 할인했던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제 블랙프라이데이는 기업의 매출 증가와 재고 정리의 의미가 더 큽니다.
이처럼 현대 명절의 경제적 기능은 생산이나 분배 측면의 역할보다 '소비'를 촉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연봉제 중심의 급여체계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명절을 맞아 별도로 상여금을 지급하는 기업들이 감소하고 있어 전만큼 넉넉한 명절을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실제로 한 포털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10년 전 우리나라 기업들이 지급한 평균 추석 상여금은 65만원인데, 올해 기업들이 지급한 평균 상여금은 이보다도 적은 58만6000원이었습니다. 10년 전보다 평균 임금이 상승했음에도 추석 상여금은 오히려 줄어든 것입니다.
이제 국내에서는 전처럼 명절을 맞아 증가한 구매력과 유동성으로 상품 시장 소비 진작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다만 주 5일 근무제와 함께 탄력적으로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이 늘면서 명절을 중심으로 연휴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레저·여행 산업과 같은 서비스 부문 지출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산업과 시대가 변화하면서 명절의 경제적 역할 역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현명했던 조상들은 본인들이 풍성하고 즐거운 명절을 기대했던 것만큼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돌봤습니다. 이런 전통은 그대로 보전하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