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빈 산현초등학교 교사
입력 2025-09-29 09:08teen.mk.co.kr
2025년 11월 12일 수요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먼 옛날 화폐가 없던 시절, 쌀농사를 짓는 농부가 소고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농부는 소를 키우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쌀을 내놓고 소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소를 키우는 사람이 쌀을 원한다면요. 만약 소를 키우는 사람이 쌀을 원하지 않는다거나 이미 쌀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농부는 소고기를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화폐의 역사는 이처럼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교환을 통해 구하고자 하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렇다면 어떤 물건이 화폐가 될 수 있을까요? 경제학자들은 화폐가 갖춰야 할 조건으로 교환의 편리성, 위조의 어려움, 공급의 제한성 등을 꼽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쌀·소금 같은 생필품, 금은 같은 귀금속, 때로는 담배나 돌덩이까지도 화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카우리(cowrie)조개'로 만든 조개껍데기 화폐입니다.
인도양의 몰디브 제도에서 주로 채취되는 카우리는 작고 반짝여서 사치품으로서 가치도 꽤 있는 편이었고, 크기와 모양이 일정한 데다 무엇보다 위조가 어려워 희소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구멍을 뚫어 끈에 10개, 100개씩 꿰어 단위화하기도 쉬워서 화폐로 쓰일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었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카우리를 '패화'라 부르며, 일부 지역과 계층에서 교환 수단이자 부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금속화폐가 보급되기 이전의 원시적 화폐 형태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패화가 10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사용되다 보니 나중에 이를 대체하는 금속화폐도 카우리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財(재산 재), 貨(재화 화) 등의 돈, 가치와 관련된 한자에는 貝(조개 패)자가 부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국 대륙에서 오랜 세월 동안 카우리 조개껍데기가 곧 '돈'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쓰였던 카우리는 3000여 년 뒤 대항해시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 상인들이 몰디브에서 조달한 카우리를 서아프리카로 들여오면서부터입니다. 처음 소량의 카우리가 들어왔을 때 서아프리카의 지배층은 이 물건을 귀하게 여겨 장식품으로 사용했죠.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카우리가 화폐로 쓰이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무렵 카우리가 서서히 화폐의 기능을 하게 되며 수요가 커지자 이를 포착한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은 대량의 카우리를 채취하여 아프리카에 톤(t) 단위로 쏟아내기 시작했죠.
이렇게 되자 카우리는 서아프리카 전역의 일상 화폐로 자리 잡았습니다. 결혼할 때 신부에게 주는 지참금, 벌금, 시장 거래는 물론 노예의 몸값까지 카우리로 매겨질 정도였습니다. 유럽 상인들에게 이 무역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인도양에서 카우리는 값싼 조개에 불과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귀한 화폐였기 때문에 그들은 조개껍데기로 노예와 금, 상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상인들이 쏟아낸 카우리는 결국 공급 과잉을 불러왔습니다. 처음에는 귀하던 조개가 넘쳐나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우리를 엮은 끈 몇 줄이면 충분했던 신부 지참금이 한순간에 자루 단위로 불어나버렸고, 카우리를 저축해 재산을 불리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섬을 중심으로 카우리의 근연종인 다른 조개껍데기까지 대량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조개껍데기는 카우리와 외형이 비슷해 서아프리카에서는 같은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화폐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희소성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카우리는 값싼 장식품에 불과해졌고, 극도의 경제적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유럽 식민 당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화와 지폐를 강제로 도입했습니다. 결국 화폐로서 카우리는 20세기 초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죠. 이 작은 조개가 남긴 흥망의 역사는 화폐의 본질이 결국 '희소성과 신뢰'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 화폐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간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