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빈 산현초등학교 교사
입력 2025-09-01 09:07teen.mk.co.kr
2025년 11월 12일 수요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1950년 7월, 일본 요코하마 부두에는 군용 트럭과 포탄 상자가 끝없이 쌓여 있었습니다. 부두의 크레인은 밤낮없이 움직였고 멈춰 있던 공장들은 다시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1946년 예금 동결 사건 이후 불과 4년, 혹독한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의 산업과 경제에 활력이 돌아왔습니다.
제철소들은 다시 불길을 뿜었고, 조선소에서는 수송선을 쉴 새 없이 건조했습니다. 파산 직전이던 자동차 회사들은 군용 차량을 만들며 기사회생했고, 전자 회사들은 무전기와 발전기, 전기 부품을 납품하느라 바빴습니다. 방직공장에서는 군복과 텐트를 대량으로 제작했고, 식품과 의약품 업계도 전투 식량과 위생물자를 생산하며 활기를 띠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폐허 위의 혼란
일본 정부의 예금 동결과 특별 재산세 부과 정책은 일본 경제를 마비시켰습니다. 일본 정부는 전쟁 때 발행한 국채를 갚기 위해 국민의 예금을 찾을 수 없게 하고, 거기에 세금을 부과해 사실상 자산을 강탈했습니다. 시중에 돈이 극도로 줄어들었지만 폭등하는 물가는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 충분한 물자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죠.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의 점령 정책도 이 혼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연합군은 일본이 다시는 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중화학공업을 해체하고, 아예 농업 중심 국가로 만들려 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산업 기반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죠.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대기업은 강제로 쪼개졌습니다. 경제 혼란과 연합군의 정책이 겹치면서 일본 사회는 더욱 불안정해졌습니다. 실업자가 급증했고 사람들은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와 파업과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람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예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이 분위기 속에서 일본공산당이 급성장했습니다. 1946년 첫 총선거에서 5석을 얻는 데 그쳤던 일본공산당은 1949년에 35석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공산당과 긴밀하게 협력하던 노동조합 세력이 급팽창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보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더 클 정도였습니다. 특히 철도, 전력, 광산 같은 국가 기간산업의 종사자 상당수가 조합원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총파업을 벌일 경우 일본 사회 전체가 멈춰 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리버스 코스와 도지 라인의 충격
그러나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자 미국은 일본의 공산주의 세력을 더 이상 놔둘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일본마저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면 아시아에서 소련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대공산주의 방파제로 일본을 육성하는 '리버스 코스(Reverse Course)'로 정책을 전환했습니다. 좌파와 노동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경찰과 정보기관을 강화하며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미국 재무부 출신 은행가 조지프 도지가 설계한 '도지 라인(Dodge Line)'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미국의 원조와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줄이는 대신 무너진 환율 체계를 1달러=360엔으로 고정해 일본이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시 서유럽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돈을 퍼붓고 있던 미국이 일본에 "알아서 수출해서 돈을 벌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무역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막상 팔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버는 돈이 적은데 정부 보조금이 줄자 엄청난 불황이 찾아왔습니다. 문을 닫는 기업이 1949년에만 1만개가 넘었고, 5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해고당했습니다. 민심은 땅에 떨어졌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급증했습니다.
연합군 사령부는 공산당을 탄압하며 좌익 세력을 약화하려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반발심을 키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좌익 세력은 거리와 공장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내린 구원 : 6·25 전쟁 특수
그러던 1950년 6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옆 나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은 미군의 병참기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미군의 군수품 대부분이 일본에서 생산되거나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향했습니다.
멈춰 있던 공장들이 밤낮으로 가동되며 경제가 급격히 부활했습니다. 6·25전쟁 기간에 일본이 거둔 '전쟁 특수'는 총 50억달러에 달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의 몇 년 치 수출액을 한꺼번에 벌어들인 것과 같은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호황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확충한 설비와 기술이 그대로 민간 산업에 흡수된 덕입니다. 자동차, 전자, 조선, 철강 산업이 이 시기에 빠르게 성장하며 경쟁력을 갖추었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조업 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