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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 14일 월요일

16세기 명나라, 은으로 흥하고 은으로 망했다

임하빈 산현초등학교 교사

입력 2025-06-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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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연합뉴스]

지폐. (출처: 연합뉴스)

 

 

16세기 명나라는 세계 최초로 지폐를 유통시킨 나라였습니다. 1300년대 말 명나라는 '보초'라는 지폐를 발행했고, 초기엔 쌀이나 면포 대신 보초로 세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보초를 남발하면서 지폐 가치가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시장에서 보초를 받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보초에 대한 신뢰가 점점 사라졌고, 1400년대 후반의 명나라는 사실상 지폐가 사라진 나라가 됐습니다.

 

이에 세금을 걷는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복잡해졌습니다. 세금은 쌀, 면포, 특산물, 요역(노동) 등 수십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지역과 사람에 따라 세금을 내는 기준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세금 체계가 너무 복잡하다 보니 중앙정부는 실제로 얼마나 걷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 틈을 타 지방 관리들은 세목을 슬쩍 바꾸거나 부풀리며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불만이 서서히 쌓여 갔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장거정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1570년대 그는 수십 가지로 나뉘어 있던 세금 항목을 오로지 은 하나로 통일하는 '일조편법'을 추진했습니다. 복잡하고 불투명하던 세금 체계를 은 납부로 단순화하자 백성들은 뭘 얼마나 내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됐고, 정부 역시 실제 세수 규모를 파악하기 쉬워졌습니다. 행정의 효율성과 세금의 공정성이 개선된 것입니다.

 

그런데 명나라에는 은이 충분했을까요? 명나라 정도의 거대한 제국에서 모든 세금을 은으로 거두려면 막대한 양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자체 은 생산량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광산 기술이 낙후돼 있었고 제대로 된 은광도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부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들어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시마네현에 위치한 이와미 은광은 처음에는 채굴되는 광석에 납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연은분리법이 건너가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자 이와미 은광이 세계 은 생산량 중 3분의 1을 담당하는 아시아 최대 은광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어 1545년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스페인이 현재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세계 최대의 은광을 발견하면서 세계 은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대량의 은이 들어오자 명나라 조정은 일조편법을 시행할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마침내 새로운 제도가 시행돼 세금이 은으로 통일되자 조세 행정이 단순해지며 부정부패가 다소 줄어들게 됐습니다.

 

GPT가 생성한 명나라에서 화폐로 쓰인 은' 관련 이미지.

 

시장에서는 은을 매개로 한 거래가 활발히 이뤄졌고 도시 곳곳에는 상점과 장터가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농민들도 곡물이나 면포를 팔아 은을 마련해 세금을 내는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경제의 흐름이 점차 선순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은은 명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본과 유럽 등 외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바탕은 외부 공급에 의존해 명나라 스스로 은의 공급을 통제할 수 없는 불안정한 구조였던 셈입니다.

 

1600년대 초 일본을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는 은이 해외로 너무 많이 빠져나간다고 보고 국부 유출 방지 차원에서 은 수출을 통제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포토시 은광의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과도한 돈을 쓰던 스페인이 재정위기를 겪은 데다 해적이 늘어나며 명나라에 유입되는 은의 양이 크게 감소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외부에서 유입되던 은의 흐름이 둔화되자 명나라 경제는 빠르게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을 은으로만 받을 수 있게 만든 일조편법은 오히려 백성에게 부담이 됐습니다. 은이 귀해지면서 시장에서 은 가격이 급등하자 농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더 많은 곡식과 면포를 팔아야 했습니다.

 

물가는 불안정해졌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졌습니다. 은을 보유한 부자들은 은 가격이 계속 상승하자 더더욱 은을 팔지 않고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통되는 은의 양은 더 줄었고 시장은 점점 얼어붙었습니다. 상업이 위축되자 정부 재정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기득권층의 권력 투쟁, 황제의 무능, 소빙하기로 인한 자연재해, 강력한 경쟁 세력(후금)의 등장 등 온갖 악재가 겹쳤습니다. 백성의 삶은 점점 팍팍해져 갔습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은 결국 세금을 낼 수 없어 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산속에 들어가 도적이 되거나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상황이 계속 악화돼 1600년대 중반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은 명나라 관군을 격파하며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명나라는 전 세계 은을 빨아들이며 한때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그 번영은 외부 자원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은의 흐름이 막히자 경제가 붕괴됐고 여러 위기가 한꺼번에 밀려들며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은은 명나라를 일으킨 힘이었지만, 동시에 명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방아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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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

1300년대 말 명나라가 세계 최초로 유통한 지폐

 

일조편법

수십 가지의 세금 항목을 은 하나로 통일한 세법

 

연은분리법

은 광석에서 납을 분리해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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