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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6월 25일 수요일

[프랑스 혁명 2편] 가혹한 세금에 평민 분노, 절대왕정 무너뜨려

임하빈 산현초등학교 교사

입력 2025-05-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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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XVI

루이 16세의 초상화. (출처: 베르사유 궁전 공식 홈페이지)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프랑스는 이미 재정 파탄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부채와 비효율적인 조세 체계는 국가의 숨통을 점점 조여 왔으며 전체 세입의 절반 이상이 선왕들이 남긴 빚의 이자 상환에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에 루이 16세는 뛰어난 경제학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를 재정총감으로 임명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튀르고는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고 특권층의 낭비를 줄이는 등 조세 체계의 근본적인 개편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상류층이 격렬히 반발했고 왕실 지출까지 검사하는 그를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싫어하게 되면서 튀르고는 불과 2년여 만인 1776년에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78년 프랑스는 튀르고가 반대했던 미국 독립전쟁에 본격 개입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7년 전쟁의 패배를 되갚고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지출을 최소화하며 조심스럽게 미국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길어지자 프랑스는 엄청난 전비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승리하며 영국을 약화시키겠다는 정치적 목적은 달성했지만, 프랑스에 돌아온 것은 실질적인 이득 없는 막대한 부채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재정은 완전히 파탄 나버리게 되었습니다.

 

  

 

시련이 계속되다

 

먹을 빵이 부족한 모습의 프랑스 평민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 민중에게 또 다른 시련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1775년부터 식량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785년 대가뭄, 1787년 대홍수, 1788년 겨울의 기록적 한파 등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하며 식량 위기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곡물 가격이 급등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급증했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반란과 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루이 16세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으며 자크 네케르,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 등 유능한 관리들이 개혁안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귀족의 거센 반발과 우유부단한 루이 16세의 태도로 인해 개혁은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귀족이 세금을 냈더라면 프랑스 정부 부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평민에게서 수탈해 재산을 쌓아온 귀족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고 루이 16세는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다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재무총감이던 네케르는 1789 5월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삼부회는 제1신분인 성직자, 2신분인 귀족, 3신분인 평민 대표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개혁안 표결 방식을 두고 수적으로 우세했던 평민들은 '1 1'를 주장한 반면, 성직자와 귀족들은 신분별로 한 표씩 행사하자고 맞섰습니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삼부회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났고 이에 분노한 평민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해 자신들의 요구를 밀어붙였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루이 16세는 국경을 수비하던 군대를 파리로 불러들였습니다. 국경 수비대가 수도로 진입한다는 소식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왕이 무력을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개혁을 요구하던 사람들을 탄압하려 한다는 불안이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789 7 11일 국민의 지지를 받던 네케르가 돌연 해임된 것입니다. 개혁에 반대하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귀족 세력이 주도한 일이었고 이는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단두대로 올라가는 루이 16. (출처: 베르사유 궁전 공식 홈페이지)

 

7 14일 시민 수천 명이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가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며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절대왕권의 억압을 상징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습격 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루이 16세는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고, 혁명 세력인 국민의회에 권력을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루이 16세는 전제 왕정을 회복하려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다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1793 38세 나이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편 귀족들의 운명은 엇갈렸습니다. 혁명 정부에 협력하거나 해외로 도피한 귀족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개혁을 거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던 일부 귀족들은 단두대에 오르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채 국외로 쫓겨났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사유재산의 인정 등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처음으로 제시된 인류사의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을 단순히 정치 제도의 변화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뒤에는 누적된 부채, 불공정한 세금, 기득권의 탐욕이 쌓아 올린 구조적 위기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절대 왕정은 수십 년간 쌓아온 빚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그 부담은 가장 힘없는 민중에게 전가되었습니다. 혁명은 결국 ''이라는 현실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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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프랑스 혁명 1편] 프랑스 혁명, 빚 때문에 일어났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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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4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절대왕정의 상징인 왕

 

루이 15

무리한 지폐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킨 왕

 

루이 16

우유부단한 정치로 프랑스를 파탄의 길로 이끈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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