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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 14일 월요일

[프랑스 혁명 1편] 프랑스 혁명, 빚 때문에 일어났다고요?

임하빈 산현초등학교 교사

입력 2025-05-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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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전투에 대한 AI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1789,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은 세계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절대왕정이 아닌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세워졌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과 민주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은 바로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은 생각보다 소박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평민들에게 전가된 과중한 세금, 치솟는 식량 가격, 높은 실업률 등 혁명의 불씨는 고귀한 이념이 아니라 손에 쥘 빵 한 조각이 없어졌을 때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배경을, 정치적 갈등이나 철학적 변화보다는 ''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태양왕의 빛과 그림자

 

루이 14세의 초상화. (출처: 파리 군사 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17세기,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수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들은 국력 과시이자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수단이었습니다. 국내 정치에서도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 정비에 착수했습니다.

 

수도 파리 외곽에 새롭게 건설한 베르사유궁전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정치 도구였습니다. 루이 14세는 지방 귀족들을 이 궁전으로 불러 모아 궁정 예절과 의전 속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이들은 점차 실질적인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자신의 대저택보다 훨씬 작은 궁전 한편의 방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사이 정치권력은 왕이 임명한 관료들이 장악하며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는 막대한 재정 부담이 뒤따랐습니다. 루이 14세가 벌인 주요 전쟁 네 차례에 들어간 비용은 현재 가치로 50조원을 넘었고, 베르사유궁의 건설과 유지에도 약 4조원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연간 세입은 약 2억리브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조원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턱없이 부족한 세입으로 인해 대부분의 지출은 국채 발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사망할 무렵 국가 채무는 연간 세입의 15배에 달하게 됩니다.

 

 

 

번영 뒤에 감춰진 몰락의 시작

 

1715,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증손자 루이 15세가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치세 초기에는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맡아 통치를 대신했습니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오를레앙 공은 선왕이 남긴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출신 금융가 존 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지폐는 금과 은의 생산량에 얽매이지 않고 발행할 수 있어, 재정을 유연하게 관리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실제로 지폐 유통 초기에는 경제에 활기가 돌았고, 국채 상환에도 일시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이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지폐 발행을 무리하게 늘리기 시작하자 물가는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평민들의 삶은 곤궁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존 로가 설립한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다가 1720년 갑작스레 폭락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이후 프랑스 경제가 다시 안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루이 15세의 초상화. (출처: 베르사유 궁전 공식 홈페이지)

 

 성인이 된 루이 15세가 친정을 시작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가 부채를 해소하지 못한 채 전쟁을 계속 이어갔고, 특히 1756년부터 벌어진 7년 전쟁은 프랑스 재정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프랑스는 북미와 유럽, 인도 등지에서 영국과 격돌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며 캐나다와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었습니다. 엄청난 전비 지출에 더해 식민지에서 들어오던 수입마저 끊기자, 전쟁이 끝났을 무렵 프랑스의 국가 부채는 현재 가치로 수백조 원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직자와 귀족들은 여전히 면세 특권을 누렸고, 세금은 고스란히 평민들의 몫이었습니다. 루이 15세가 뒤늦게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된 뒤였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

(클릭) [프랑스 혁명 2편] 가혹한 세금에 평민 분노, 절대왕정 무너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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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 폭락으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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