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빈 산현초등학교 교사
입력 2026-06-01 09:08teen.mk.co.kr
2026년 06월 09일 화요일

캐나다 카드 화폐(1714). (출처: 캐나다 중앙은행 박물관(Bank of Canada Museum))
지금 당장 세상에서 돈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돈으로 거래하던 물건을 사고팔 수가 없게 되고, 경제가 마비될 것입니다. 이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 다른 것으로 돈을 대체할 것입니다. 1685년 캐나다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 돈이 사라진 식민지
17세기 프랑스령 캐나다(누벨프랑스)는 만성적인 화폐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식민지에서 거래에 필요한 금화와 은화를 전부 프랑스 본국에서 배로 실어 와야 했는데, 배가 제때 오지 않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서양은 폭풍과 해적의 위협으로 인해 대단히 위험한 바다였습니다.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식민지 정부는 상인들에게 외상을 달아 물자를 조달했습니다. 처음엔 상인들도 정부를 믿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외상이 쌓일수록 상인들의 부담은 커졌고, 정부는 더 이상 외상을 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장 곤란해진 건 군대였습니다. 군대 예산이 바닥나자 식민지 정부의 장관 자크 드 뫼유는 자기 사비와 지인 돈까지 끌어다 병사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685년 여름, 이로쿼이족과의 전쟁까지 터지면서 재정은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본국에 돈을 요청했지만 배는 오지 않았고, 상인들에게 빌리려 해도 이율이 33%에 달하는 고리대 수준이었습니다. 이대로면 병사들이 굶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 돈? 만들면 된다
해결 방법을 고심하던 드 뫼유의 눈에 병사들이 가지고 놀던 트럼프 카드가 들어왔습니다. '트럼프 카드를 돈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는 식민지에 있던 트럼프 카드를 모두 거둬들인 뒤, 카드 뒷면에 액면가와 자신의 서명을 적어 병사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카드 한 장은 4리브르, 반으로 자른 카드는 2리브르, 4분의 1짜리는 15솔로 정했습니다. 공식 화폐를 대신한 임시 화폐였으므로 프랑스에서 금화가 도착하면 그때 진짜 돈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도 함께였습니다.
당시 트럼프 카드는 빳빳한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져 있어 실용적이었고, 뒷면이 비어 있어 서명을 적기에도 좋았습니다. 드 뫼유는 자신의 서명 외에 총독과 재무관의 서명도 함께 받아 신뢰를 더했습니다. 거부하면 벌금을 물게 했지만, 실제로 거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카드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유통됐고, 그해 말 프랑스 금화가 도착했을 때 약속대로 모두 현금으로 교환됐습니다.
드 뫼유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이 방법으로 군대는 평소처럼 생활했습니다."
◆ 생각보다 괜찮았다
놀랍게도 카드 화폐는 모두의 신뢰를 얻어 식민지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고무된 식민지 정부는 이듬해에도 동전이 부족해지자 다시 카드 화폐를 발행했습니다. 그 후 무려 수십 년간 식민지 정부는 프랑스에서 돈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카드를 찍어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1705년에는 이가 아예 법정화폐로 지정됐고, 1714년에는 유통 총량이 200만리브르에 달했습니다.
물론 잡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1716년에는 병사 네 명이 팀을 꾸려 8만리브르어치 위조 카드를 찍어냈습니다. 북 치는 병사가 북소리로 도장 찍는 소리를 감추는 등 치밀함까지 보였지만 범인들의 씀씀이가 갑자기 커진 것이 눈에 띈 탓에 발각됐습니다. 카드 화폐의 위조가 쉽다는 취약점이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 카드 화폐의 종말
그러나 진짜 위기는 외부에서 왔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을 치르며 재정이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1714년 본국 정부는 유통 중이던 카드 화폐 액면가의 절반만 실제 화폐로 바꿔주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카드를 쥔 사람들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절반가량 증발했습니다. "금화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이 깨지는 순간 카드 화폐의 신뢰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719년 카드 화폐는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극심한 화폐 부족으로 식민지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졌습니다. 1729년 상인들의 요구로 다시 카드 화폐가 발행됐고 이번에도 제법 잘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1750년대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카드 화폐가 남발됐고, 1760년에 전쟁에서 이긴 영국이 캐나다 식민지를 접수하면서 이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영국이 남은 카드 화폐 액면가의 25%만 보상했으니 끝은 4분의 1토막이었던 것입니다. 트럼프 카드가 식민지의 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산현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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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르(livre)
프랑스의 예전 화폐 단위. 1리브르는 20솔(sol)에 해당했습니다.
라틴어로 '무게'를 뜻하며, 은 1파운드의 가치에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franc)으로 대체됐습니다.
법정화폐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화폐로, 오늘날 각국 지폐가 모두 법정화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