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강원대학교 교수
입력 2025-05-12 09:09teen.mk.co.kr
2025년 06월 25일 수요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공상과학 영화와 같이 수만 년 전 동굴에 살던 원시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늘 높이 솟은 빌딩,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스마트폰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들까지… 그에게는 모든 것이 마치 마법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특히 원시인은 사람들이 카트에 먹음직스러운 것들을 가득 담은 뒤 계산대에서 종이 몇 장이나 플라스틱 카드 한 장만 내밀고 물건을 들고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내가 일주일을 넘게 사냥하고, 채집해도 얻을 수 없는 먹거리를 받으면서 왜 그냥 종이를 주는 거지? 사냥도구나 그릇 같은 가치 있는 물건과 바꾸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현대의 경제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종이는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닌 화폐이며, 이 화폐가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믿기 때문입니다.
챗GPT가 생성한 ‘신용(credit)' 관련 이미지.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거래 시스템은 화폐뿐 아니라 신용을 기반으로 운영됩니다. 신용이란 쉽게 말해 "이 사람은 나중에 꼭 갚을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것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이 신용 덕분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빌린 돈을 갚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용이 없는 사람은 단순히 돈을 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거래가 어렵고, 경제생활에도 큰 제약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현금과 카드, 이 모든 것이 '신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약속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신용이 사회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먼저, 은행은 더 이상 대출을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과연 갚을까?"라는 신뢰가 없다면 누구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집을 구하거나 학비를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마트나 가게에서도 "이 카드, 혹은 이 돈이 진짜인지 믿을 수 없어!"라며 그동안의 결제 수단을 거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물물교환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쌀 한 포대를 내가 만든 신발과 교환해야 한다면, 매우 비효율적이겠죠?
더 심각한 문제는 국가 수준에서 벌이는 큰 규모의 경제활동들이 마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로를 건설하거나 병원을 짓는 일처럼 큰 자금이 필요한 사업은 대부분 은행이나 투자자에게 돈을 빌려 진행됩니다.
하지만 신용이 없다면 자금 조달이 막히고, 모든 인프라스트럭처 사업과 기업 활동이 중단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용이 사라지면 사회 전체가 멈추고, 실업자가 늘고, 경제는 마치 엔진이 꺼진 자동차처럼 멈춰 서게 됩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이처럼 신용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국가 수준의 경제 주체에게도 꼭 필요한 보이지 않는 자산입니다. 구체적으로 국가가 왜 신용이 필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 나라도 위기 상황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같은 재난 상황에서 정부는 병원을 짓고, 백신을 사고, 국민에게 긴급지원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가가 항상 충분한 예산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럴 때 국가는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도 하는데, 국가 신용등급이 그 기준이 됩니다. 이 신용등급은 "이 나라가 빌린 돈을 잘 갚을 수 있을까?"를 평가하는 점수입니다.
실제로 남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는 한때 석유가 풍부한 부국이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경제 운영으로 인해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국가신용등급도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그 결과 화폐 가치는 폭락했고, 빵 한 덩어리를 사기 위해 지폐 한 가방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국 화폐보다 외국 통화를 더 믿게 되었고, 경제는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나라도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외국인인 투자자들이 한국의 신용을 의심하며 대규모 자금을 회수했고, 그 여파로 환율이 급등하고 많은 기업이 줄줄이 파산했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신용은 국민 개개인의 삶까지도 직접적으로 흔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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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등급이 높으면 외국에서 낮은 이자로 자금을 조달할 수 윘지만,
등급이 낮으면 투자자들이 외면하거나 고금리 조건을 내세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