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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16일 목요일

세상을 구한 건 영웅이 아니라 비누였다?

최병일 강원대학교 교수

입력 2026-02-0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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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균과 비누 [Whisk 생성]

(Whisk 생성)

 

여러분은 인류 역사상 사람의 목숨을 가장 많이 구한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죽어가는 사람을 기적적으로 살려내는 '항생제'(페니실린)일까요, 아니면 치명적인 질병의 공포를 끝낸 치료법일까요? 영화 '어벤져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지구를 구하는 아이언맨의 최첨단 나노 슈트 같은 기술을 상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꼽는 발명품은 아주 평범하고, 어찌 보면 시시해 보이는 물건입니다. 바로 여러분 집 화장실 세면대 위에 놓인 '비누'입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인류의 평균 수명은 고작 40세 안팎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이나 기근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살인자, 바로 세균과 바이러스였습니다. 당시에는 위생 관념이 희박해 의사들조차 수술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태어난 아이들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각종 감염병으로 사망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비누가 대중화되고 '손 씻기'가 일상이 되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간단한 화학작용 하나가 수인성 전염병과 호흡기 질환을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학자들은 비누 보급 이후 인류의 평균 수명이 20년 이상 늘어났다고 분석합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착각합니다.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이나 전 세계를 멈춰 세운 코로나19 같은 대재앙이 닥쳤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백신이 우리를 구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식사 전 손을 씻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습관이 누적되어 만든 결과가 백신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 같은 현상은 '행동경제학''식별 가능한 피해자 효과(Identifiable Victim Effect)'와 관련이 깊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폴 슬로빅 교수는 기부금 모금 실험을 통해 이 현상을 증명했습니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아프리카의 식량난에 대한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300만명의 아동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식량 생산량은 전년 대비 40% 감소했습니다"와 같은 팩트였습니다. 반면 두 번째 그룹에게는 통계 대신 일곱 살 소녀 '로키아'의 사연과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로키아는 극심한 가난으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부가 이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두 번째 그룹의 기부금이 통계 자료를 본 첫 번째 그룹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심지어 통계 자료와 로키아의 사연을 함께 보여주었더니 오히려 소녀의 사연만 보여줬을 때보다 기부금이 줄어드는 기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300만명'이라는 거대한 숫자보다 눈빛이 살아 있는 '한 명'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따뜻한 공감 능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냉철한 판단을 방해하는 '비합리성'이기도 합니다. 비누가 수억 명을 살린 통계적 사실보다 특효약 하나가 죽어가던 환자를 벌떡 일으키는 장면에 더 환호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경제를 바라볼 때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때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확실한 '빌런(악당)'을 찾고 싶어합니다. 기업 오너가 회삿돈을 횡령하고, 무능한 부패 관료가 세금을 낭비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대중은 분노합니다.

 

하지만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진짜 무서운 적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잘못된 경제 정책''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입니다. 탐욕스러운 기업가 한 명은 수백, 수천 명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만 잘못 설계된 국가의 경제 정책은 수천만 국민 전체의 삶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멸망시킵니다. 예를 들어 시장의 원리를 무시한 가격 통제 정책이나 혁신을 가로막는 낡은 규제들은 당장 눈에 띄는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손을 씻지 않는 습관처럼 사회 전반에 서서히 병균을 퍼뜨립니다. 기업의 투자는 위축되고, 일자리는 조금씩 사라지며, 물가는 서서히 올라 국민들의 실질 소득을 갉아먹습니다. 세상은 화려한 영웅이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손을 씻고, 규칙을 지키며, 합리적인 선택을 쌓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강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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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 가능한 피해자 효과

(Identifiable Victim Effect)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의 고통을 보여주는 통계적 수치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진 구체적인 특정 개인의 사연에 더 큰 동정심을 느끼고 반응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인간의 뇌가 추상적인 정보보다 생생한 서사에 더 강력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효과는 구호단체의 모금 활동이나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자주 관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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